스타트업의 글쓰기

1/글쓰는 사람들

나는 모든 성공한 스타트업 창업자들, 투자자들, 그리고 구성원들이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이는 어느정도 맞는 말이었는데, 어느정도는 틀린 말이기도 했다. 어떤 성공한 사람들은 곧잘 문제시될 정도로 많은 글을 썼고, 어떤 성공한 사람들은 사람은 대외적으로 글을 잘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테슬라 사장님은 SNS 상에서 매우 떠들썩한 사람이고, 애플 사장님이나 구글 사장님은 SNS 상에서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다.
인디 메이커 피터레벨즈는 전세계 아무데서나 노트북으로 뚝딱뚝딱 혼자 코딩해 웹사이트를 만들고 이 웹사이트를 자기 트위터에 올려서 마케팅을 한다. 10년동안 키워 온 그의 트위터 계정은 이미 27만명이 들어주는 멋진 마케팅 채널이 되었으니까.
엔젤리스트 창업자인 Naval Ravikant는 스타트업을 떠나서 인생조언도 하고 하고 싶은 말들을 곧잘 하신다. '부자가 되는 방법' 같은 되게 자극적인 주제에 대해서 몇 시간짜리 분량의 트위터 스레드를 쓰기도 하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명으로 자리잡았다.
창업자나 투자자가 아니더라도 특히나 자신을 어필하기가 정말로 힘든 미국 / 해외 인재 시장에서는 Twitter, Substack, 개인 Blog를 통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보였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통해서 내게 존경을 품게했다.
온라인 상에서의 공개적인 글쓰기는 특히나 이민자 미국인들의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시장진입 전략이었다.
2/좋았던 순간들
오래 전부터 그런 이유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해서 소개하고, 회사에서 배운 점에 대해서 소개하고, 퇴사한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창업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내 제품에 대해서 소개하고, 우리 팀에 대해서 말하고, 스타트업에 대해서 소개하고, 내가 배운 점에 대해서 소개하고, 아는 인사이트 모르는 인사이트를 되는대로 나누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것들을 되새김질하고, 해야 할 일들을 선언과 명령들로 바꾸고. 그러면서 나아가는 것들이 되게 익숙했다.
어떤 분께서 그런 말을 해주셨다. 다운님은 겉과 속이 되게 똑같은 사람이라고. 나는 그 말이 되게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랫동안 겉과 속이 정말 다른 사람이었는데 글쓰기를 통해서 겉과 속이 같은 투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좋은 말이든 안 좋은 말이든 이야기 해주는 것을 감사히 여겼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연결될 때가 제일 기뻤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때가 좋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효능감을 얻을 때가 좋았다.
3/내 글의 쓸모
막상 1년동안 거의 매일매일 글을 써본 결과 모든 글이 그렇게 유익하고 가치있지는 않았다.
나는 아마 별로인 글도 썼고, 괜찮은 글도 썼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시공간적 맥락 속에서 다른 사람이 내 글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 누군가는 내 글에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다고.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꽤 좋아하지만, 나의 모든 글이 나의 그런 마음까지 전하지는 못했다.
4/마케팅
경우에 따라 - 마케팅의 수단으로서 글쓰기와 컨텐츠의 효용은 분명해보였다. 수 만명, 수십 만명의 피드에 내 글이 도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 숫자의 조종을 받는다. 좋은 숫자를 보면 다음 좋은 숫자만을 떠올리면서 뭔가를 실행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요즘 들어 느낀 것은 마케팅이 고객가치에 치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B2B SaaS인 경우 기업들이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 (예: 홍보, 투자 유치, 그로스 해킹, 채용, 업무 프로세스)을 짚어서 도와주는 이런저런 해결방안과 대안을 짚어주는 글들이 좋았다.
가끔 마케팅 목적의 글쓰기를 하다보면 '유저, 팔로워들을 수익화한다.'는 일념하에 움직이는 기계적이고 사무적이고 차가운 사람의 이미지를 상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정신을 번뜩 차리곤 한다. 그럴 때 한 번씩 그 사람 / 사람들이 지금 겪고 있는 문제가 뭐였더라... 그 생각을 한다.
5/희로애락
나는 가끔 웃으면서 글을 썼고 울면서 글을 썼다. 어떤 때에는 그냥 그것이 너무 행복했고 어떤 때에는 감동적이었고 어떤 때에는 그냥 힘들었다.
나는 뭐랄까,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은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면 안되는 줄 알았다.
근데 스타트업 대표도 했고 투자사 파트너도 하고 있는 Ben Horowitz가 자기가 겪은 힘듦에 대해서 쓴 책(하드씽)을 읽고나서 휴, 그런 이야기 해도 되는구나. 하고 어느정도 안심했다.
나는 가끔 말끔하게 차려입고 정장입고 넥타이한...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 가끔씩 자기 감정 얘기나 터놓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내가 때때로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취약해지고 싶기는 한데 공개적으로 취약해지면 공격을 받거나 오해를 사기 때문에 요즘에는 중요한 정보는 내부인에게만 공개되어 있는 폐쇄적인 커뮤니티가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필요하다면 모든 걸 세상에 드러내더라도 부끄러움이 없는 오픈소스 브랜드, 오픈 스타트업들을 동경하곤 한다.
나는 오픈소스와 공개적인 기업활동 (Build in Public)이 돌고돌아 사람들이 더 자신에게 떳떳하고 투명해지더라도 안전한 세상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디, 투명한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6/이해관계의 일치
내가 쓰는 글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늠하곤 한다. 글을 많이 쓰다보니 느끼는 것은 내가 너무 많은 주제를 말하고자 하면 사람들에게 나를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가능하면 AI, 스타트업, 프로덕트, 성장에 대해서 써왔고, 앞으로도 이것에 대해 쓰면 어떨까 한다. 이것에 대한 제품 (크레스트)을 만들어서 사랑받는 프로덕트 성장을 돕고, 내가 하는 이야기의 어딘가를 이 프로덕트와 앞으로 걸어갈 여정과 계속해서 연결지으면 어떨까 한다. - 그러면 모든 이해관계가 일치되지 않을까?
얼마전에 어떤 분과 만나서 받은 질문 중에서 '글을 왜 쓰시냐'는 질문에 나는 꽤 세속적인 대답을 했다.
'학습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마케팅 효과가 있다.' 같은 것들. 약간은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했지만 나의 가장 큰 동기는 어쩌면 그렇게 다른 분들과 만나고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 유대감을 위해서인데... 어쨌든 나는 글을 쓰면서, 사람을 만나면서, 서로 다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보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세상을 점점 덜 미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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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저런 맥락에 대해서 점점 더 신경쓰고 디테일한 인간이 되어가면서 앞으로의 글쓰기는 이전보다 더 많이 신중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분께서는 부디 멋진 하루 보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