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없는 놀이공원

이건 회원 탈퇴와 구독 해지, 그리고 넛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비스 공급자들에게는 ‘회원 탈퇴’와 ‘구독 해지’를 쉽게 만들 이유가 없다. 그래봤자 지표가 떨어질 뿐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회원탈퇴와 구독해지를 즉시 처리하는 기능을 만들지 않거나 이메일로 처리하는 등 기능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것은 공급자의 입장에서 꽤나 자연스러운 선택지다.
놀이공원과 백화점은 정말로 복잡하고 다양한 유인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들어왔던 길을 그대로 따르면 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IT 프로덕트에는 정해진 출구가 없다. 입구는 10개, 100개가 있는데, 출구는 미로를 통과한 자들만이 건널 수 있다.
아마존의 출구를 찾아서.
가입과 결제는 원 클릭으로 만들고 탈퇴와 해지는 ‘N단계’를 거쳐야 한다.
구독상품이 정말로 많은 아마존

아마존에는 구독상품이 정말정말 많다.
- 킨들 언리미티드
- 프라임 비디오
- 뮤직 언리미티드
- 구독 할인제
- 아마존 키즈+
- 어디블
- 생필품 구독
듣도보도 못한 상품이 있을 수 있다. 아마존은 그런 회사니까.
입구가 진짜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책 페이지에 방문하면 어디블 오디오북을 ‘구매’할 수도 있고 ‘구독’할 수도 있고 킨들 언리미티드를 ‘구독’할 수 있고 전자책 버젼을 ‘구매’할 수도 있다.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당신이 원하는만큼의 돈을 내고 그들이 준비한 놀이공원에 ‘입장’할 수 있다. 다만 퇴장은 조금 다른 문제다.

N단계의 가입 해지 과정
최근 아마존은 ‘모든 구독 관리’ 메뉴를 일부 개선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그러한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Audible의 해지 퍼널이다.
- 계정 상세 페이지에 진입해야 하고
- 해지 CTA 버튼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 반드시 해지사유를 선택해야 하며
- 크레딧이 몇 개 남았는지 오디블에 다른 어떤 기능이 있는지 다시 알려주며
- 모든 단계에는 ‘재구독’, ‘다른 플랜’ 선택지를 함께 노출시키며
- ‘최종 확인’까지 이르지 않으면 모든 진행상황은 보류되어 구독이 유지된다.

때때로 아마존이 사용하는 문구는
- 사용자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메세지
- 구독을 유지하는 게 더 이득이라는 메세지
- 구독을 취소하는 과정 자체와 그 결과에 대해 유저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씌우는 메세지
를 포함했다. 다양한 아마존 구독 서비스의 해지 동선은 지난 10여년간 법률이나 경쟁 환경, 상품 구성, 소비자 분쟁 등의 흐름을 따라 이래저래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 동선을 굳이 쉽게 만들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출구는 입구보다 3배에서 10배가량 찾기 어려웠다.
아마존을 제외한 다양한 국내외 구독제 서비스들에서도 이같은 동선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서비스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라기 보다는 서비스 공급자의 입장과 유저의 입장 쌍방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비활성화’와 ‘회원 탈퇴’: 소셜 네트워크

적어도 30일간은 당신을 탈퇴시켜줄 생각이 없다.
페이스북은 가장 탈퇴하기 어려운 소셜 네트워크이다. 일단 탈퇴를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부터가 막막하고, 탈퇴가 아니라 ‘비활성화’를 권장한다.
Facebook 계정을 영구 삭제하기로 결정했다면 다음 단계를 따르세요:
- 컴퓨터 또는 모바일 장치에서 Facebook 계정에 로그인합니다.
- Facebook 홈페이지 오른쪽 상단의 아래쪽 화살표를 클릭합니다.
- "설정 및 개인정보"를 선택한 다음 "설정"을 선택합니다.
- 왼쪽 열에서 "내 Facebook 정보"를 클릭합니다.
- "비활성화 및 삭제"를 선택합니다.
- "계정 영구 삭제"를 선택하고 제공된 단계를 따릅니다.
- Facebook에서 결정을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표시되며, 계속 진행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보안 확인을 완료해야 할 수 있습니다.
- 요청을 확인하면 Facebook에서 계정 삭제 절차를 시작합니다.
- 완료하는 데 최대 90일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도 마찬가지로 탈퇴가 어렵고, 트위터도 마찬가지로 탈퇴가 어렵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검색엔진에 내부정보가 잘 노출되지 않는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안에서는 바깥의 정보를 끊임없이 흡수하지만, 바깥에서는 안의 정보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인스타 맛집 오픈 시간 같은 정보를 우연찮게 알고 싶어서 인스타그램에 한 번 로그인을 해버리면, 나의 회원 탈퇴 스케쥴이 즉시 초기화된다.
소셜 네트워크에는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가 작용한다. 딱 한 명이라도 떠나는 이를 막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영원히 탈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친구가 나의 탈퇴를 가로막는다. 적어도 30일간, 90일간 이를 감내해야 한다.
회원 탈퇴를 하지 않고 단순히 로그인을 안 한다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구독되어 있는 마케팅 이메일을 통해서 30일마다 60일마다 90일마다 알림 이메일을 보낼 것이다. '클릭 한 번만 하면 로그인을 할 수 있어요. 새로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세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여러번 탈퇴한 경험이 있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떠난 건 두 세 번을 넘겼다. 그럴 때마다 나는 페이스북의 그 완고함이 싫었다. 그들의 네트워크와 시스템이 갖춘 힘이 나의 의지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회원 탈퇴’는 ‘개인정보 파기’를 뜻하지 않는다.

어떤 날에 나는 ‘잊혀질 권리’라는 개인정보 권리에 꽂혀서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100개 넘는 서비스의 회원 탈퇴를 진행했던 기억이 있다. 경험상 IT 프로덕트의 백엔드 시스템을 유저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흔치 않고 (심지어 노코드 툴의 흥행으로 서비스 운영자도 잘 모를 수 있다.) 굉장히 많은 서비스가 ‘제대로 된 회원탈퇴 기능’을 마련해놓지 않았다.
- 어떤 서비스들은 회원 탈퇴를 진행한 고객의 개인정보를 명시적으로 삭제하지 않는다.
- 어떤 서비스들은 회원 탈퇴를 진행한 고객의 개인정보를 작업 스케쥴을 통해서 삭제한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프로그램이 실행되면서 개인정보를 삭제한다. 따라서 유저는 오늘 회원 탈퇴를 진행했지만 실제로 개인정보가 지워지는 일은 30일 이후가 될 수도 있다.
- 어떤 서비스들은 회원 탈퇴를 완료하고 다시 같은 이메일로 회원가입을 진행했더니 서비스가 내 이용내역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다.
- 어떤 서비스들은 이메일을 통해 탈퇴를 요청한 고객에게 자꾸만 교차영업을 한다. 아 사실은 당신이 원하는 기능이 이미 있다. 이걸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
유저가 서비스 이용을 완전히 중단하고 개인정보를 삭제해달라고 회원 탈퇴를 요청했음에도 이러한 실제 회원 탈퇴의 진행 단계와 시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개인정보를 삭제할 것이라는 서비스의 약속 자체도 조금 경계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객의 정보가 실제로 완전히 삭제됐는지 아닌지 직원이 아니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약속이 지연되고, 아예 이행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개인정보를 가지고 무얼 하겠다’가 아니라 그런 작업을 하기가 귀찮고, 딱히 우리 수입을 늘려주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법으로 의무화된 개인정보보호교육이 있으므로 교육을 듣고 자료를 읽게 될 것이다. 약관과 개인정보처리방침을 꼼꼼하게 읽고 개정한다. 언뜻 간단한 일로 보이지만, 비즈니스를 성공시키는 와중에도 모든 부분에서 충실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B2C 서비스 공급자가 철저히 자신의 인센티브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면.

매일매일 데이터 대쉬보드를 확인하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아마 알 것이다. 출구를 잘 만드는 일에 아무런 인센티브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딱히 우리 프로덕트의 KPI가 오르지 않을 것이며
- 딱히 내 연봉이 오르지 않을 것이며
- 딱히 고객만족도가 즉각 오르지 않을 것이다.
- 고객은 불편에 마주했을 때 불편을 이야기한다. 불편이 없을 때는 불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 회원탈퇴와 가입해지를 쉽게 만들면 단순히 ‘회원탈퇴와 가입해지’에 대한 고객불만이 덜 들어온다. 그러나 서비스에 대한 인상 자체가 좋아진다는 보장을 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회원 탈퇴와 해지 절차를 숨기고 유인을 놓고 어렵게 만들면
사람들이 실제로 그걸 덜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는, 한 단계 한 단계가 어려워질 때마다 가시적으로 고객의 ‘가입 해지 실패사례’가 증가한다.
데이터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 켠이 즐거워질지도 모른다.
“내가 결정한 디자인 덕분에 가입 해지 전환율이 떨어졌다니! 이것이 나의 성과라니!”
당장 이 사실을 나의 성과를 평가해줄 동료들과 상급자에게 알리고 이직할 때 써먹을 나의 이력서에 ‘XX 구독 잔존율을 XX% 개선했다’는 찬란한 문구를 넣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 수도 있다. 이는 모두 사실에 기반을 둔 성과다.
가입해지 동선에서 어려움을 겪은 고객에게는 최초 1회에 한하여 1개월 구독권을 무료로 지급하면서 ‘지금 해지하지 않으시면 30일 더 혜택을 드릴게요’라는 문구와 반짝이는 구독 연장 CTA 버튼을 보여준다.
그렇게 하면 그들 중 대다수는 30일 무료 혜택에 만족할 것이다. 고객센터에 불만을 늘어놓지도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절차를 다 거치고도 여전히 탈퇴와 해지를 진행하는 고객들은 1)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2) 모종의 이유로 서비스에 대한 화가 머리 끝까지 차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면 1번 고객들을 향해서 당신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건지' 쉽게 설명하기로 한다. 그동안 15000원을 절약했어요. 아직 크레딧이 남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지하시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지를 하는 고객은 구태여 붙잡지 않는다. 그들은 충분히 화나 있지도 않고 충분히 돈을 지불할 여력도 없으니 우선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제 한 가지 유형의 고객만 남는다. 화가 난 고객.
고객 불만을 간접화된 고객센터로 이전한다.
고객센터를 직접 운영하지 않고 외주나 별도 법인을 통해 최소 비용으로 운영하고 그마저도 최대한 많은 부분을 자동화한다. 시간은 한 푼도 쓰지 않되 돈은 기꺼이 쓴다. 혹은 자동화와 시스템 구축에 소질이 있는 고객팀을 구성하여 하루에 수 백 수천 건의 고객문의를 손에 꼽는 수준의 적은 인력이 전부 다 처리하도록 만든다.
화가 난 고객에게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무엇보다 그건 감정적으로 힘들고 생산성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수지타산을 계산하자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화가 난 고객이 화가 안 날 때까지 고객응대를 한다. 그런데 그 응대는 제품 팀이나 엔지니어가 하지 않아야 한다. 최대한 간접적인 주체, 자동화된 주체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서 고객센터는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자동화되고 있는 것 같다.
챗봇이 더 많은 문의를 처리해야 하고, ARS가 더 많은 문의를 처리하고, 문서가 말을 대신해야 한다. 앱스토어 리뷰 댓글은 ChatGPT로 달아야 한다. 상담원과 고객팀의 수동작업은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그 상담원이나 고객팀은 최대한 친절해야 하고, 성과 평가는 자동화되어야 한다. 가장 성과가 좋은 상담원의 태도와 전략을 높게 평가하고, 그렇지 않은 상담원들은 빠르게 빠르게 ‘회전’한다.
상담원의 시간이나 — 제품 팀 직원의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일이 돈으로 해결되는 일인지 생각해본다. 고객이 지불한 비용 일부나 전액을 환불해드린다.
환불을 받고 나면 모든 어려운 단계를 지난 고객의 화도 씻은 듯이 없어진다.
그러고도 화가 나있는 사람들은 1) 블랙 컨슈머이거나 2)통계적 이상치 라고 여기기로 한다. 법적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돈으로 극소수의 화난 고객들의 시간의 문제를 최대한 많이 해결하면, 고객들은 당신의 서비스가 ‘혜자’이며 ‘대인배’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런 일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이것이 아마존닷컴의 고객 집착 플레이북이다. 어찌됐든 아마존의 물건은 많고 값은 싸고 배송은 빠르며 문제가 되었던 나의 비용은 즉시 환불되었으니까. 고객의 Jobs To Be Done은 달성했으니까 괜찮은지도 모른다.
이러한 구독해지 패턴과는 상반되게 아마존은 실제로 고객경험, 평판이 특출나게 좋은 업체 중 하나이며 이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최고의 놀이기구가 중요한 거지 출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 아니야?

'부디 환상의 나라로 오시길 바란다. 출구가 없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건 자유와 주도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전에 나는 이 출구없는 놀이공원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옳고 그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올바른 것이 정해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 또한 여지없이 이같은 선택지에서 망설일 때가 있다. 이건 사실 자유와 주도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 당신이 당신의 개인정보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가? 아니면 서비스가 당신의 개인정보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가?
- 당신이 당신의 행동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가? 아니면 서비스가 당신의 행동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가?
- 당신이 서비스를 조작할 수 있는가? 아니면 서비스가 당신을 조작(Operationalize) 할 수 있는가?
- 서비스가 당신을 더 즐겁게 한다면 당신에 대한 조작은 합리적인가? 아니면 합리성을 떠나서 당신은 조작되고 싶지 않은가?
현대 사회에서 단 한 번도 조작 당하지 않는 길은 요원하다.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넛지’가 당신을 향한 ‘조작’으로 느껴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모든 조작이 나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무단횡단을 하면 안된다든지, 법을 지켜야 한다든지하는 말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것도 당신이 아니라 사회와 다른 누군가가 함께 결정한 '조작'이기는 하니까. 우리는 어쩌면 사회에 태어난 순간부터, 어쩌면 스마트폰을 구매하고 인터넷에 가입한 순간부터 시스템과 타인의 조작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다.
이같은 조작을 망라한 책 ‘넛지’의 저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자유지상주의적 간섭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람들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선에서 긍정적 간섭 (예를 들어 라면이나 시리얼을 매일 먹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도록 특정 영양을 보충해준다든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주택마련을 도와준다든지.) 을 권장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출구없는 놀이공원’은 만들지 말아야 할까?
아니면 ‘합리적인 의사결정’일까?
-
P.S: 이 글을 발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한참을 고민했었다. 쓰기 불편한 글이었고 읽기 불편한 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읽는 분들의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서 자체적인 가치판단 자체는 유보하기로 했다.